<집, 그 소리풍경> (이찬규) #1. 도마, 소리의 기억집은 일반적으로 형태적인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안과 밖이라는 경계도 그렇게 생겨납니다. 그런데 집에 대한 추억이 형태를 넘어서 청각적인 것으로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행복했던 시간들 중의 하나는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들려오던 아침이었습니다.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1943~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총체적인 것이다. 어떤 형태(form)가 아니라 분위기(atmosphere)이다. 건축이 형태에 관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야말로 건축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집은 우리의 생명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참 소중한 곳이어서, 어떻게 단순히 모습으로만 이야기 하겠습니까. 요즈음은 아침에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고 출근하니, 도마 소리에 잠을 깨던 시절은 유년의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가끔씩 채소를 많이 섭취하려고 믹서기로 갈아 먹는데, 아침에 듣는 그 소리는 파를 ‘송송’썰거나 찌개거리를 ‘듬성듬성’자를 때 나는 도마 소리와는 사뭇 달라서 식탁 앞에 얼떨떨하게 서 있기도 합니다. 언젠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어린 시절 기억나는 소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의 기억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보고 보여 지는 것이 중요한 세상이니 보이지 않는 소리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은 것이 당연할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의 인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의 마지막 저서의 제목은 『초의 불꽃La flamme d’une chandelle』입니다. 온전하게 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을 남기고 별세하셨지요. 촛불은 무엇보다 시각적인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많은 부분이 촛불의 ‘소리 듣기’에 할애되고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하나의 극단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작은 빛의 드라마들에 감성을 가지게 된 지금, 우리는 절대적으로 시각적인 이미지들의 특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촛불 앞에서 고독하고 고즈넉하게 몽상을 하고 있노라면, 우리는 빛을 발하는 이 생명이 또한 말을 하는 생명이라는 점을 이내 알게 된다. 거기서 시인들 또한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Maintenant qu'avec une image excessive nous nous sommes rendu sensible aux drames de la petite lumière, nous pouvons échapper aux privilèges des images impérativement visuelles. En rê̂vant, solitaire et oisif, devant la chandelle, on sait bientô̂t que cette vie qui brille est aussi une vie qui parle. Les poètes, làencore, vont nous apprendre àécouter.”저는 한밤중에 촛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바슐라르를 검색하면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사상가로 평가되어 있지만, 그가 시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겁니다. 빛에서 소리를 듣는 자(者)이니까요. #2. 한옥, 눈어렸을 때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정릉 한옥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눈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간직하게 됩니다. 겨울이 오면 한밤중에 자다가 계시 같은 소리가 들려 깨어났던 것이지요. 계시(啓示)란 ‘보여서 일깨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무릇 모든 신(神)적인 계시는 보이지 않는 소리로 현현되어 왔습니다. 그 소리를 찾아 마루의 미닫이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 소식을 소리로 먼저 알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눈이 그치면, 소리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눈이 참 하얗습니다. 김광균(1914~1993)의 ‘설야’라는 옛 시도 있고요.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처마 밑에 호롱불 야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눈이 마당으로 자꾸 쌓여가는 겨울밤이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의 기척처럼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 내리는 소리는 그 주위로 정적을 만들어냅니다. 그럴 때는 누구든지, 정적의 먼 뒤안길로, 죽은 자도 살아있는 자도 다시 살아가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하, 그래서 기침을 해볼까요? “눈은 살아있다 /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 (…) // 기침을 하자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눈을 바라보며 /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 마음껏 뱉자”(김수영의 ‘눈’중에서). 집 안에서 들려오는 도마 소리, 그리고 따뜻한 주전자에서 술이 나오는 소리처럼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있겠지만 골목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도 있습니다. 이왕 옛 시들을 시작했으니, 다른 옛 시도 하나 더 떠올려봅니다. 서정주의「한양호일(漢陽好日) 」입니다.“열대여섯살 소년이 작약꽃을 한아름 자전거 뒤에다 실어끌고 이조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연계같은 소리로 꽃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옥색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와요 불러도 통 못알아듣고 꽃사려 꽃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위에 올라서면 작약꽃 앞자리에 넹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오.”‘한양호일’을 검색하면 『조선일보』에 게재했던 장석남 시인의 해설이 가장 많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해설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실지로 이 소년은 꽃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양의 어느 골목의 풍경을 넉넉히 하기 위한 것이 제일인 듯하다.”하지만 제가 보기엔, “실지로”그 소년은 꽃을 팔기 위해 “열심히”소리치는 것이겠지요. 장석남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꽃을 팔아 이문을 남겨 돈을 벌게 생겼는가. 꽃에 반해 그저 싱글벙글 한시라도 행복하겠는가. 막 목청 트인 목소리로 꽃을 사라고는 외치나 그것은 호객일 수 없고 그저 그러한 가사의 신명 들린 노래였으니 그 소리에 반해서 창호지 창문 열고 부르는 아주머니의 표정도 꽃빛이었을 터.”하지만 제가 보기엔, “실지로”그것은 ‘호객’입니다. 호객이라 한층 더 낭랑하게 “옥색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호객을 하는 소년은 바쁩니다. 꽃 사려는 아주머니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저희 가족이 정릉 한옥집에서 살 때 꽤나 경험했던 것이었습니다. 작약 꽃을 파는 열대여섯살 소년뿐만 아니라 계란 장수도 확성기로 외치다, 두부 장수도 종소리를 내다가, 고물 장수도 가위소리를 내다가, 그렇게 불러대건만 바쁘게 지나가버릴 때가 있습니다. 좀 더 움직여서 좀 더 많이 팔려고 하는 그 사람들을 잡으려고 냅다 대문을 열고 쫓아가는 어머니의 뜀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 들은 유년의 저도 그 뒤를 뒤질세라 냅다 쫓아가면, 마당에 기르던 개도 쫓아오며 컹컹 짖어댑니다. 어쨌거나 「한양호일(漢陽好日) 은 좋은 날입니다. 그 소리들이 “작약빛”으로, “먹기와집”위 “옥색의 공기 속”으로, “백지의 창”으로 다채롭게 번져가는 것을 시인은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가장 덧없이 사라지는 감각이지만, 색채와 공명(共鳴)하는 그 소리들은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사람들이 살다간 집과 골목사이에 남겨진. #3. 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요즈음은 제가 사는 동네 우이동 주민 센터에서 탁구를 배웁니다. 천성이 게을러서 공식적인 학교 외에 다른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은 처음인 듯합니다. 초중고 시절에도 학원교습이나 과외 같은 것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막 고 3을 마칠 때 쯤 어머니께서 돈을 줄 테니 피아노 학원을 다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소주 마시고 있던 시절이라 거절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혼잣말처럼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네가 기초라도 배우면 우리 집 마루에도 피아노 한 대 들여 놓을 텐데…”그렇지요. 그때는 학교에 적어내야 하는 무시무시한 가정환경조사서가 있었습니다. 조사서에는 여러 물품의 목록이 있고 집안에 그것이 있으면 옆에 있는 괄호 안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록 중의 하나가 생각납니다. 피아노. 초등학교 4학년 때 저는 서울 어느 먼 변두리 공립학교에서 지각을 한 벌로 교무실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연탄난로 주위에서 보리차를 훌훌 불어가며 마시던 선생님들 중 한분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반장, 부반장은 피아노에 동그라미 친 애들 중에 뽑으면 별 문제가 없어요. 걔네들이 착하거든.”집안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오랜 시절 동안 단란한 가정을 상상하게 하는 불변의 매개체였습니다. 마침내 저희 집이 정릉으로 이사 왔을 때, 언덕배기 윗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지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의 첫 소절을 반복해서 연주하는 소리였는데, 어린 나이에도(초등학교) ‘좋은 동네로 이사 잘 왔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피아노에 대한 물신화는 서양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장 피에르 귀통은 산업혁명시대에 대도시의 부르주아 가정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이상적인 가정’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근대교육을 받은 자녀들과 피아노 소리의 공조”는 계층적 우위의 표상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인간 야수La bê̂te humaine』에서는 폭력으로 점철된 부부 싸움의 장면이 길게 묘사됩니다. 그런데 그 부부싸움을 더욱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처녀들의 명랑한 피아노 소리입니다.“(…) 그는 그녀 옆으로 몸을 날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거머쥐더니, 얼굴을 바닥에 처박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부부는 잠시 그렇게 미동도 없이 서로 마주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윽고 이 무시무시한 침묵 속으로 도베르뉴 집안의 처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밑에서 들려왔는데 피아노 소리가 맹렬하게 울려 다행스럽게 아래층으로는 싸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녀들이 즐기는 원무곡(圓舞曲)을 클레르가 노래하고 소피는 열성껏 피아노로 반주를 맞추는 것 아니겠는가.Il s'était jetéàson cô̂té, il l'avait empoignée par les cheveux, pour la clouer au sol. Un instant, ils restèrent ainsi par terre, face àface, sans bouger. Et, dans l'effrayant silence, on entendit monter les chants et les rires des demoiselles Dauvergne dont le piano faisait rage, heureusement en dessous, étouffant les bruits de lutte. C'était Claire qui chantait des rondes de petites filles, tandis que Sophie l'accompaganait àtour de bras.”(Emile Zola, La Bê̂te humaine, Pocket, 1998, p.44.) 서양으로부터 들여온 피아노는 우리나라에서 선진국의 문화라는 명목으로 그 존재가치를 드높였던 같습니다. 『개벽』(1922, 11)에 게재되었던 현진건의 단편소설 「피아노」에서 주인공 남자는 소위 ‘신여성’과 재혼하기를 꿈꾸는 졸부입니다. 마침 아내가 죽자 중등교육을 마친 여성과 ‘양옥집’에서 살림을 차립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선물이 ‘피아노’임을 알자 두 시간도 못되어 양옥집 거실에 피아노를 사들입니다. 하지만 그녀도 남자도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릅니다. 그들은 길거리를 지나는 누구라도 들으라며 아무렇게나 피아노를 쿵쾅거리며 행복에 겨워합니다. 피아노는 음악을 들려주는 악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게 하는 서양 문물의 표상, 그러니까 계급적 우위의 표상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집에서 경우 없이 피아노를 연주하다가는 이웃집에서 항의를 받기 십상입니다. 옆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그 어떤 물신화의 작동도 없이 단순한 소음으로 접수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제 피아노 소리가 더 이상 어떤 계층적 표상으로 휩싸이지 않는 시대가 좋습니다. 피아노는 음악을 들려주는 악기이니까요.탁구를 배운지 두 달이 되어갑니다. 운동이라곤 북한산 어귀에서 산책을 하거나 방안에서 맨손 체조나 하던 제가 상대방과 호흡을 맞추면서 공을 주고받는 재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탁구공을 주고받는 소리는 좀 방정맞은 데가 있습니다. 구기 종목들 중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있다면 가히 배드민턴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름 저녁이 오고 소녀들이 공터에서 배드민턴 탁탁 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름은 여름 저녁이 있어서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 덧붙이면, 농구하는 소리도 좋습니다. 봄날이 지나가는 저녁 무렵, 게임이 아니라 소년 혼자서 농구공을 몰고 가다 골대에 넣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밤이 이슥해져도 여전히 들려옵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마 잊은 것이겠지요. 잘 연주하는 음악도 좋지만, 그렇게 무심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음악보다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집은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만져지기도 하고 맡아지기도 하고 들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집은 이렇게 다양한 지각들을 통해서 장소(場所)적인 남다른 결들이 생겨나고 점점 더 넓어집니다. 우리는 서로가 참 깊고 너른 집에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