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담긴 햇살 한 그릇아침나절의 끝자락, 햇살은 사각거리는 대나무 사이사이를 지나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은 마루에 머문다. 대나무의 감촉을 지닌 햇살은 마루를 지나 방 문턱을 타고 점점 방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온다. 이내 방석을 타고 소반으로 올라 소반 위 그릇에 잠시 머문다. 기다란 햇살이 그릇에 오롯이 담긴 순간, 한 사발의 햇살을 마신다. 그릇을 소반에 내려놓자, 햇살의 꼬리는 어느새 방구석에 있다. 벽을 타고 오르며 점점 작아진다. 이윽고 천정에 이르지 못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햇살은 이미 내 안의 곳곳에 퍼져 있다.⟪우주적⟫ 전시를 마친 후 지쳐있는 심신이 채 회복되지 않은 이서재 작가를 만나던 날, 햇살은 대나무 이파리들을 타고 한옥의 마루에 걸쳐 있었다. 작가와의 담소를 나누는 동안 햇살은 소반 위 비어 있는 그릇을 채웠다. 나는 그 햇살을 마시며 이것이 이서재의 작업임을 알았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릇. 하지만 이미 자연으로 채워져 있는 그릇. 이서재의 삶은 길게 드리워진 햇살 같았고, 그의 작업은 햇살이 그릇에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같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아침나절 끝자락이 되어서야 햇살은 잠시 그릇을 채우고, 이내 바닥의 귀퉁이를 옮겨가 벽면을 타고 오르며 점점 크기는 작아지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 한 줌 햇살이 그릇에 담기는 시간은 아주 짧다.과거를 지우고 내일만 생각하며 전진하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낱 한 줌의 햇살과 같다. 많은 사람이 현대적인 것을 부르짖고, 물질적 풍요를 갈구하며, 편안함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앞만 바라보며 뛰는 이에게 삶의 의미는 물질적 풍요와 신체적 안락함뿐이다. 가끔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겠지만, 아침 햇살이 그릇에 담기는 시간처럼 너무 짧다. 그리고 어김없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불어넣은 물질적 욕망의 소용돌이에 다시 빨려 들어간다.이서재는 달랐다. 서촌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이자 삶의 터전인 한옥이 햇살을 품은 그날, 작가가 흙으로 빚어낸 그릇이 햇살을 담은 그때, 햇살을 마시며 나는 알았다. 한 줌 햇살을 한 번 마셨을 뿐인데도, 잠시나마 삶의 의미가 변하는데, 그것을 매일 먹는(食) 작가는 어떠하겠는가? 이서재는 햇살을 머금은 집이며, 그릇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햇살이 가득했다. 한 줌 햇살이 그릇에 담기는 시간은 잠시겠지만, 이서재라는 집에 스민, 그릇에 담긴 햇살은 그 충만했고, 그 충만함으로 영원할 듯 보였다. 그가 햇살로 충만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깨닫게 된 문화적 근간과 자연주의적 삶 때문이리라. 치기 어린 시절 이서재는 현대적인 미술을 뒤쫓으며, 비디오와 퍼포먼스를 했다. 그러다 또다른 현대적인 미술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13년 동안 생활하며 사진, 영상, 오브제를 혼합한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그저 껍데기만 화려한 현대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과 회의를 갖게 됐다. 그러면서 다른 시각으로 프랑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시절 그가 감동했던 것이 전시장의 작품보다 밖에 나와서 보는 바다와 파도, 바람, 곤돌라, 사공들의 노래에서 다가오는 감흥이었다. 자연과 삶이 주는 감동의 깊이를 점차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서재는 새로운 생각과 태도를 갖게 되었다. 바로 “그 땅에서 싹을 틔운 생각의 뿌리가 삶의 전반에 걸쳐 모든 문화와 행동의 근거를 만든다”는 생각과 태도. 이후 작가의 마음속 그릇에 오롯이 채워진 생각은 “우리의 문화적 근간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였다(「태도로서의 예술」, 이서재의 인터뷰 중).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이서재의 작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전까지 그는 어떤 작업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생각과 태도가 바뀐 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접근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인 다른 차원의 예술로 그를 끌어올렸다.이제 이서재에게 예술은 삶 그 자체가 되었다. 13년간의 프랑스 파리 생활을 마감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것도, 돌아와 가장 먼저 한옥을 구해서 옛 느낌이 살아있는 ⟪집⟫으로 꾸민 것도, 흙이 공간을 끌어안고 있는 도자를 빚는 기술을 배운 것도, 시간을 빚듯 술을 빚는 방법을 배운 것도, 자신이 빚은 그릇에 밥을 담고 빚은 술을 담아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우리의 산천을 알아가기 위해 산을 타고 내를 건너는 것도, 벼루에 먹을 가는 것도, 자신이 봤던 곳을 붓에 먹을 묻혀 그리는 것도, 모두 이서재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작업이 되었다. 어느 순간 그에게 햇살은 아침나절 끝자락에 잠시 그릇을 채우는 짧은 순간의 환희가 아니라, 매일 먹어서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는 생각과 태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서재는 여전히 햇살이 집에 깃들길, 그릇에 채워지길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삶이고 작업이기 때문이다.“태도가 형식이 될 때”는 기존의 작품 형식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실험성을 잘 드러낸 문구로 유명하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기획한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에서 나온 문구로 젊은 작가 중에서는 이 문구를 자신의 작업 모토처럼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아마도 이 문구가 자신의 작업이 가진 새로움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가 열린 것은 1969년으로, 이미 낡은 새로움이다. 게다가 이 문구를 되뇌는 젊은 작가들의 태도가 형식이 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작품을 미술사의 한 귀퉁이에라도 걸려는 설정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이서재는 다르다. 그는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산다. 어쩌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서재는 이제 기존 예술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기존의 예술에 그리 관심이 있지도 않은 듯 보인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아갈 뿐 ….이서재는 오늘도 햇살을 먹었을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햇살을 먹을 것이다. 그의 그릇에 담긴 햇살을 다시 한번 마시고 싶다. 아니다. 마시지 않고, 이번엔 먹을 것이다. 분명 사람들과 나누길 좋아하는 작가는 언젠가 다시 나를 햇살 가득한 자신의 한옥으로 불러줄 것이다. 그때 사각거리는 대나무 이파리들에 베인 햇살 자락이 이서재가 빚은 그릇에 오롯이 담긴 순간, 햇살을 먹어 다시 한번 내 몸에 가득 채우리라. ◼︎글. 안진국(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