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온 이후 찬바람이 불면 의례 감기가 찾아왔다. 오래동안 낫지 않아서 병원에 가면 환경때문에 생긴 비염이라고 했다. 겨울이 들어서고 아프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이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았다.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해도 비켜가지 않았다. 어김없이 같은 증세가 이어졌고 마음은 몸의 고통보다 더 비틀거렸다. 올해 처음 미장원에 앉아 거울에 비추어진 나를 바라다 보았다. 퉁퉁 부어있는 내 얼굴에 맑지 않은 낯빛을 바라다보며 몇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랑을 갈구하고만 있었구나 싶었다. 유달리 많이 쏟아낸 한해를 보내고 나면 꼭 그런 마음이 들었다. 가슴에 누군가에게 건네어 줄 마음이, 사랑이 지금은 넉넉하지 않구나 하고 거울을 바라보며 알았다. 미장원의 거울 뒤로는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올 한해는 사람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가 썰물처럼 쓸려갔다. 마음을 주던 많은 것들이, 사람들이, 떠오르는 태양 빛을 머금은 바다 위 수천의 은하수 같이 반짝이며 가슴에 다가 왔으면서도 소중히 깨질새라 어루만지며 보듬던 마음들이 서해바닷물 빠지듯 끝없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집전> 은 집의 의미를 이렇게도 알려주고 저렇게도 알려주었다. 좋은 시간들을 많은 사람들과 집에서 북적대며 이루고서도 또 떠나고서는 그것이 춥고 외롭게 했다. 사람살이가 다 그런 것이라고 마음을 잠재우고, 불안과 서운함과 외로운 것들을 달래는데 두어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오늘 뜨는 해와 내일의 해가 다르지 않을 것인데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맞는 마음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한다. 삶이 죽음으로 다다를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소중한 오늘이 있음을 새삼 한해를 보내며 생각한다. 어제는 이런저런 사유로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내었다. CT촬영을 하면서 혹 잘못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들자 유서를 쓰지 않은 것이 어쩐지 안타까웠다.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 몇자 적고 있는데 간호원이 별 다른 큰 이상이 없다고 알려왔다. 그 급히 썼던 유서는 잠시 접어두었다. 제법 비용을 지불하고,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돌아왔고, 조금 더 앓다가 몸은 다시 회복했다. 그래서 오늘 밤은 언제든 우리에게 닥칠 끝을 위해 유쾌하고 긴 유서를 한장 쓰면서 한해를 마무리 할까 한다. 아마도 그 유서는 매년 마지막 날 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 보는,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내 약속이기도 한, 그러나 그 유서를 기억하지 않고 지내면서도 또 한해를 다부지게 살아 낼 씨앗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이렇게 맞닿아 있다. 만남과 헤어짐도 맞닿아 있고 얻는 것과 잃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한해를 되돌아 보면 감사해야 할 만남과 일들과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다. 일일이 되짚어 보자면, 잠 못이루며 세는 양의 마리수나 하늘의 별의 수처럼 끝이 없을 일이다. 그렇게 축복받은 한해였다. 그 셀수없는 별들 처럼 반짝여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꼭 집어 당신이라 말하지 않아도 당신, 그래요, 바로 당신.인줄 알기를 바라며 오늘을, 한해를 닫을까 한다.내일 아침은 인왕산에 오르려고 한다. 또 새해에는 더 열심히 산을 타야지 생각한다. 새해 때마다 작심삼일처럼 다짐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삼일이라도 지켜지는 작심이 계속 반복되기를, 그 작심삼일이 삼일마다 한번씩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일상을 지키는 힘' 이다. 영원이라는 것은 실은 ‘존재하지 않음’이 그 비밀이다. 그저 하루하루가 끝이라 생각하고 지켜가는 것이 곧 영원이 된다는 것을 알면 조금 기운이 날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오늘 끝날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일에 애쓰기를. 그래서 끝이 좋다. 사랑한다고, 오늘을, 내 마음에 품은 미래를, 그 길을 함께 가는 당신을, 당신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끝을 맞는다. 2017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