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전: 리뷰> 9월 16일 : 하루집밥, 하루주막 / 글. 이경순2017년 9월. 서촌 이서의 집이 열렸다. 이서의 초대에 응한 낯선 이들이 그의 집에 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집전> 중 하나의 프로그램인 <하루 집밥, 하루 주막>에 참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한 사람이 사는 집의 풍경과 시간과 행위를 ‘전시’한다는 것에 눈이 크게 뜨였다. 나에게는 <집전>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 자체가 신선한 ‘딴 짓’이고 도전이었다.그날의 이야기는 ‘집밥’과 ‘술’. 집에서 밥과 술을 나누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묻는 자리. 집 밥과 직접 빚은 술은 곡진하고 맛났다. 가을날이 어둑해질 무렵 이서 집의 정겨운 마당을 향해 도란도란 걸터앉아 밥을 기다리는 사람들. 밥을 짓고 반찬을 소복하게 쌓는 사람의 손길. 지은 밥을 사발에 담는 나무 주걱의 질감. 내 몫의 국밥 사발을 받아 안고서 한참을 느낀 온기. 따뜻한 불빛 속에 그윽한 색을 발하며 침샘을 자극하던 밥과 반찬의 생김새. 빚은 지 한 달여 만에 처음 연 농염한 술 향기.시간이, 풍경이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밥을 짓고 함께 먹는 것이 이렇게 따사로울 수 있구나, 좋을 수 있구나. 예술과 인문학이 필요한 건 일상적 경험을 새롭게 묻고 그 안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때론 그것을 견딜 수 있게, 때론 그 너머 새로운 지평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이서는 집이라는 일상이 예술이 되도록, 감춰진 물음을 꺼내놓게 인도하는 자였다.이서의 집에서 돌아와서는 또 다른 물음이 찾아왔다. 집을 열어 놓은 행위는 무엇인가. 집의 일상을 남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무섭게 쌓이는 먼지와 출처를 다 알 수 없는 잡동사니 속에 사는 나에게 집이란 무엇일까.나는 집안의 먼지와 곰팡이, 부엌 천정의 기름때에도 동요하거나 개의치 않고 살아왔다. 심지어 더러움을 잘 견디기 위해 설거지 할 때 안경을 벗기도 한다. 나는 예전부터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인 일이 드물었다. 친한 친구도 집에 초대하길 꺼려해 온 것이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집을 내보일 경우 황급히 청소를 하고 헝클어진 내 일상의 자취들을 벽장 속으로 구겨 넣었다가 그가 돌아가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이의 방문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방문자는 ‘객관적’ 시각으로 내 집 곧 나를 평가할 수 있다. 밖에서는 멀쩡한 직장인이지만 집안에서는 먼지 구덩이에서 뒹구는 또 다른 내가 있다.이서의 <집전>에서 돌아온 나는, 구석구석 반질한 정성을 다한 이서의 집과 그 집이 타인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데 감동받았다. 그러다가 나의 집을 떠올렸다. 잠시 얼어붙은 의식은 곧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흘렀다. 왜 내 집은 깨끗하지 못할 뿐더러 다른 이의 방문을 불허하는가. 나의 집은 곧 내가 타인에 대해 갖는 심리적 경계인가. 그동안 외부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의 경계를 열거나 낮추는 데 나는 늘 어쩔 줄 몰라 했고 쩔쩔매었다. 온전히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고 힘들다고 느끼며 살고있다. 내가 가진 부끄러움, 수치심과 나의 집은 어딘지 닮아 있다.곧이어 내가 태어나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살던 집이 생각났다. 그 집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낡은 적산 가옥이었고 그 집의 보잘 것 없고 허름함에 꼭 내 모습 같아 부끄러워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그 낡은 집을 보이기 부끄러워 나무 뒤에 숨어서 친구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집에 들어간 기억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남 보기 부끄러운 집을 사실은 사랑하기도 했다. 그 집은 허물어져가는 목조건물이었지만 걸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는 어두운 긴 복도, 쥐들이 소란스러운 각 방에 딸린 음침한 창고. 목욕탕에 있던 깊고 둥근 녹슨 욕조, 등나무가 넓게 뻗친 뒷뜰은 남들에게는 알릴 수 없는 소중한 나만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읽게 된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에 나오는 작가의 집이 왠지 우리 집과 비슷해 놀라기도 했다. 집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그 집에서 탈출하는 것이 어머니의 꿈이었고 나의 꿈이기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작지만 번듯한 연립주택으로 이사 가게 되었고 내 생애 최초의 집이었던 그 곳과 시원섭섭하게 이별하였다.지금 나의 집은 그 어린 시절 집과는 생김새가 천양지차지만 낡고 누추하고 남부끄러운 집이라는 것도 닮아있다. 나의 부끄러움과 연결되어 남들을 초대 못하는 집이라는 점도 닮아있다. 나는 어느덧 그 어린 시절 집의 원형적 체험을 현재의 집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은 나의 내면이기도 하고 내면의 확장이기도 하고 기억의 저장소이자 생이 이루어지는 원형적 체험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서는 그 무엇에 앞서 집이란 생명을 품고 에너지를 생성시키는 장소라는 점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사람을 새롭게 살게 하는 일이다. 서촌의 작은 귀퉁이, 그 공간을 갈고 닦으면서 이서는 집의 의미를 묻고 집을 살린다. 더욱이 집을 살린 그 집안 일들을 빼어나게 해내면서 남들과 나누고 살고 있다.이서의 집을 다녀와서 나는 한참동안 현재의 집과 어린 시절 그 집을 떠돌았다. 과거와 마주치고 부끄러움이 많던 어린 나를 위로하고 어루만졌다. 그러다 결국에는 집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 준 생명과 에너지도 짚어보게 되었다.(이건 순전히 이서 덕분이다.) 내 어린 시절의 집. 그 눅눅하고 침침한 어둠과 집이 품고 있었던 기울어지고 낡은 것들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오래되고 보잘 것에 없는 것에 대한 친숙함과 애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내 업을 이루게 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집전>이 나에게 던져 준 화두는 현재 여기까지 와있다. 집에 대한 생각과 상상이 앞으로 더 뛰놀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큐레이터. 서촌과 자문밖 일대를 우리 동네라 자랑하며 부암동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