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저녁, 서촌 이서재에서 작지만 빛나는 주막이 열렸다. 우리는 따뜻한 국밥과 술을 나누며, 더불어 대화도 나눴다. 소박한 음식을 통해 [이웃], [정]과 같은 어느덧 잃어버린 단어를 작가는 집으로 불러들였고, 이러한 가치들이 집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요소임을 되새겨 주었다. 외톨이처럼 밖을 떠돌던 단어들이 집으로 돌아왔고, 좀 더 충만한 삶은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임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비로소 우리들의 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이 순간은 어쩌면 잃어버린 전통의 이야기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내게 있어 전통은 한동안 [옳고 그름]의 문제였다. 역사적 부침으로 빼앗기고 단절된, 외압적 요소로 맥이 끊긴 안타까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겉모습은 일부 그러했을지언정, 없어지지 않은 과거의 흔적이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온전히 남아있는 듯 하다. 마치 탑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마음이 남는 것처럼. 그리고 현재 삶의 환경에 따라 그 흔적이 다시금 현대성을 갖고 발현하고 있다. 전통의 형태를 계승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그 안의 맥락을 알고 이어가는 것이 결국에는 전통을 계속 살아 숨 쉬게 할 것이다. 현재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상의 것을 만들어 가는 것. 과거의 것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고, 전통과 현대성을 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 한국적인 가치를 제대로 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현대공예가 하지훈 작가는 말한 바 있다. 이서재는 [집전]을 통해 우리의 집이란 무엇인가-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그녀의 집을 들어내어 보여준다. 난해한 현대 미술의 옷이 아닌, 편안한 그녀만의 옷을 입고서 우리에게 잊혀진 기억을 불러낸다. 한때 익숙하였으나, 이제는 여러 이유로 멀어진 것들을 자연스럽게 소환한다. 돌아온 것들은, 세월의 더께를 털어내면 병산서원 앞의 모래밭처럼 여전히 반짝인다. 이제 집 너머의 무엇인가를 이서재에게 기대하는 이유다. 우리의 집에서 새로운 전통의 흐름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김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