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관한 사랑스런 단상“집이 불타 갈 곳을 잃었다.그녀와 헤어진 내 심정이 그러했다.”나는 <파리로망스>를 그 문장으로 시작했다. 잿더미로 무참한 내 집을 발견하고 절망했을 때, 이별은 나의 이별이었다. 이별은 이별이란 단어로는 체감되지 못했고, 사랑도 은유로서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사랑은 깃들지 않는다. 단어를 창문삼아 사랑을 건너 봐야 하니 사랑을 알려면 그 창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나의 창이 여닫고 안팎이 통하는 문인지 가로막힌 벽인지에 따라, 사랑은 일방적인 폭력이거나 불안을 녹이는 마법으로 현현한다. 그래서 사랑은 오해의 구조로 지어진 건축물이다.“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Go back to your home.아내가 내 집이었어. 이젠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 My wife was my home. I haven’t any more.”_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영화 속에서 남자는 부인이 죽고 매일이 정처없다.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 마음이 마음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는 것, 그것이 이별이다. 이별은 돌아갈 집이 없다는 깨달음의 절망이다. 기형도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던 시의 제목도 <빈 집>이다. 사랑을 잃은 그는 생명체를 잃은 폐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지만, 살아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프랑스어에서 사랑은 아무르(amour)이고, 그것은 엄마의 유방(젖을 품고 있는 방)을 찾는다는 고대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다. 집은 사랑을 은유하여, 사랑은 집이다.사랑은 집이라고 쓴 내 문장은 허전하다. 그것이 불명확하고 흐릿하여 오해에 오해를 더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감정의 이름이자, 관계의 이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 말할 때 사랑은 감정을 지칭한다. 우린 연인이다, 는 말에서 사랑은 관계의 종류를 규정한다. 남자의 사랑은 사랑을 감정으로 소비하며 대상을 지속적으로 바꾸고, 여자의 사랑은 하나의 대상에게 비롯된 감정을 사랑스런 관계로 안착시키려 한다고들 말한다. 내게는 사랑이 감정으로 시작하여 관계로 안착되는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랑스런 관계가 만들어지면 관계의 탄력성이 커지며 늘어지고 눌리고 치여도 좀체 끊어지지는 않는다. 큰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며 제 자리를 유지한다. 튼튼한 구조의 사랑은 오해를 품고 녹이며 강건해진다.그러나 현대의 집은 버려지고 있다. 우리의 몸이 쉬고 잠자고 생활하는 집은 경제논리로 환원되어 이야기되면서, 그 공간안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지워진다. 우리는 얼마짜리 공간에 사는 사람으로, 집의 객체로 대상화되어 왔다. 그것은 아파트나 한옥에 살든, 서울이나 제주에 살든 다르지 않다. 집에 사람은 없고, 공간의 넓이만 남아서 돈의 액수로 바꾸어지고 있다. 집과 함께 우리의 육체도 함께 버려졌다. 육체도 가장 이상적인 형태(164cm에 43kg혹은 182cm에 68kg 등)를 갖춰야 하는 대상으로 축소되었다. 집과 사람이 지워진 자리를 숫자가 차지하여 우리를 당당하게 압박하고 있다.집이 버려졌고, 우리는 집밖의 집을 구하고 있다. 문제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꼭 쥔 채 대부분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무엇일까? 우리가 버린 집은 잊은(oubliée) 집일까, 잃은(perdue) 집일까? 대답은 각자에게 달려 있겠으나, 분명 지금은 스마트폰안에서 집밖의 집을 구하는 시대다. 사랑밖의 사랑이 언어로는 가능하나 현실에서 세우기 불가능하듯, 집밖의 집도 그러하다. 설령 구한다하더라도 스마트폰으로 세운 집은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다녀야 하며,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을 신경써야 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그것은 집이라고 할 수 없다. 집은 내가 스스럼없이 풀어질 수 있는 공간이자, 내가 원초적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집은 시공간으로 내게 자유의 절대치를 허락하는 개념이다. 사랑이, 연인의 육체와 사랑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다.마지막 단상. 혼자 있으면서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우리는 카페로 몰려가고, 주방의 기능을 식당으로 아웃소싱하여 음식의 시대를 열고, 내 냉장고를 편의점으로 대체하는 등 우리는 집을 버리고 집의 기능을 집밖의 다른 곳으로 아웃소싱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비난이 아니다.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사랑의 개념을 다시 창조해내야 한다던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어쩌면 집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지금이 집의 개념을 재창조하여 집을 구원하고, 사랑을 구원하여 나를 되살려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