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일지
:김윤 일지
2016년 7월 14일
故 김윤 선생님의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으스스 걸어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묵직한 것이 횃불을 들고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는 장면이 그려지는 촉감으로 느껴지는 기분이다. 짊어 지어야 할 것이 많았던 우리 시대를 살았고 그 짐을 기꺼이 이고서 평생 한 뜻, 한 의미로 산 여성, 민주 운동가이자 농민 운동가의 삶이 조금씩 눈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2016년 7월 16일
김윤에게 보내진 편지를 읽고 있다.
그 편지를 읽다보니 문득,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만났던 한 중국학생 떠올랐다. 같은 작업실을 썼던 그는 늘상 중국의 정치적 부조리,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작업을 무거운 방식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2005년 즈음 이었으니 이미 그런 무거운 방식의 작품이 진부해 보이기도 했던 때라 그 친구에게 왜 너는 그렇게 무겁게만 작업을 해야 하니, 라고 물었을 때 그 친구가 말했다.
‘나는 중국사람이다. 중국사람에겐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이 있다. 자신의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 중국사람으로 자기가 속한 그 나라의 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제외하고서 내가 무엇을 말 할 수 있느냐' 라고 내게 반문했다.
김윤을 추모하는 주변인들의 편지를 보면서 어렴풋 김윤선생님의 성품과 의지를 짐작 할것 같았다. 자신이 어디서 태어난 줄을, 암흑의 시절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아셨던 분이구나 했다. 그 숙명을 받아드리는 일, 그래서 선봉에 서서 여성으로서 두려워 않고 옳은 말 뱉는 일에 망설이지 않으셨구나 했다.
2016년 7월 17일
한 사람의 인생이 무겁게 다가오고 있다.
그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처럼만 느껴지지 않는 이 마음은 무엇인지 아직 정확하지는 않은 채로.
잘 알지 못했던 사건의 전말을 알면 알아 갈수록, 우리의 왜곡된 역사들을 인지하면 할수록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
이토록 무거운 역사의 물결 속 한 사람. 그 삶의 초상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가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수면 위로 떠올려 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초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초상이라는 방법으로 드러난 한 사람의 단면이 그 삶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든다.
해방이후 한 정권을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벌어진 사건들, 억압하고, 짓발고, 은폐하고 조작하여 바꾸어 놓은 진실들에 맞선 시민과 선봉에 섰던 이들의 사건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 알게 되면 될 수록 보면 소스라 치게 놀라는 것은 그 사건들의 파렴치함과 지금도 버젓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가 끝나지 않은것이다.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2016년. 지금은 2016넌. 2016년 즈음이되면 그런 일들이 사라지고 성숙한 국가의 모습이 되어있을 것이라 대학생이었을 때 상상하였었다.
가슴저 아래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혀를 거세하고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억압같은 것을 느낀다.
2016년 7월 21일
김윤 선생님의 전 남편이셨던 강기종 선생님을 만나뵈었다.
역시 민주화 운동가이시고, 전국 농민회 총연맹 사무총장이셨고, 지금도 인권운동을 펼치고 계시는 선생님을 만나 당시의 이야기들을 또 다른 시각에서 듣게 되었다.
강기종 선생님의 입장과 경험에서 보는 시각으로 전해들은 그 일대기는 또 한편의 영화나 대하드리마 보듯 들으며 놀라기도 하고 화를 내가도 하고 껄껄 웃기했지만 실로 우리가 처했던 당시의 1970년, 80년대의 막막한 현실, 권력의 억압과 독재 정치로 인한 사건들을 그 중심에 계셨던 분에게 소상히 들으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민주주주의가 그저 가만히 온 것이 아님을 더욱 실감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대로 번복되고 있는 이 권력의 이기, 정치의 이기, 소통의 억압을 눈으로 보며 여전히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역사를 되풀이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생각하니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더 힘든 것은 이 불통의 권력 앞에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
그 불통이 고도의 전략이라고 까지 느껴지는 것.
우울하고 무겁다.
2016년 7월 25일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의 일대기를 접한다.
어머니, 어머니라는 이름.
한 사람의 인생을 안다는 것은 내 안에 다른 우주가 다시 들이닥치는 사건이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시대가 내 놓은 과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고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한사람의 이기심이 얼마나 거대한 문제를 야기 했고 반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 었을까 생각해 본다.
책을 읽고 있는 오래된 이 집의 기둥에 기대어 시간을 살펴본다. 우리는 무엇을 딛고 오늘에 살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우리에게 어제란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시간 위에, 억압되지 않는 평등의 사회를 구현하고자 자신을 던졌던 사람들 위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 무엇이 달라지기라도 했나. 여전히 소통하지 않는 권력을, 소수의 인권이 억압되고 올바른 집회의 자유가 보장 받지 못하는 행태들을 보면서 이 뿌리 깊이 썪은 권력은 영원히 죽지 않는 무슨 바이러스처럼 살아 꿈틀 대는 것 같아 보인다. 정당한 것을 부르짓는 목소리는 이토록 연약하고 힘이 없을 수 밖에 없는가. 옳고 정의로운것의 성격이란 그래서일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그 중심에서 인생을 던졌던 등불같은 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희망이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는것을 되풀이 되는 역사속에서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내가 이런 엄청난 분의 일대기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 자격이 있는 것일까 조심스럽게 또 진지하게 묻게 되는 무덥고 습한 여름의 이서재 뜨락이다.
2016년 9월 1일
김윤선생님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부터 1년여간 구속되어 수감되셨던 서대문 형무소 찾아갔다.
서대문구 독립공원터에 자리 했던 서대문 형무소는 일부 축소되어 남아 있는 건물들이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한민국 국민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그 의지를 꺾지 위해서 지어졌다. 내부에는 서대문 형무소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부터 독립운동사, 독립운동가의 역사, 고문의 형태, 수감의 형태등이 여러방법으로 열거되고 재현되어 있다.
형무소내 전시장을 도는 내도록, 역사를 설명하는 영상물을 보는 내도록, 지금은 한적한 공원처럼된 푸른 잔디가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것을 보며 걷는 내도록 가슴이 먹먹하고 아렸다. 분명 이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했는데 해방이후에는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억울하게 탄압을 받았던 것 처럼 독재정권에 반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짓던 사람들이 마치 역사를 반복하듯 그 곳에 수감되었다.
김윤선생님 역시 그 반복된 역사의 희생자였다. 그 사건들은 모두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졌고 그 조작된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받은 많은 이들이 있다.
일제 강점게에 그 권력을 쥔 자들이 우리국민들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여전히 반복적으로 답습되어지고 있었다. 외부세력이 우리 민족을 억압하던 그 구조물에서, 한 권력이 집권을 유지하고자 국민의 평등과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물로 다시 사용 되어진 것이었다.
또 한가지 놀랐던 사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그러한 해방이후의 역사적 오류는 연구되어 언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역사박물관으로 개관하게 될 당시 해방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규정을 만들어 문을 열었고 현재까지도 그 규정이 바뀌지 않고 있으며개정을 위해 서대문 구청에 개정을 요구하더라도 의원들이 반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학예연구사님께서 말씀해주셨다. 지금, 2016에도 그 역사는 정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구나 절감하였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사를 넘어 우리역사의 오류를 시인하고 우리의 민주화운동사를 제대로 말하고 연구하고 알려주었을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면서도 지금 이시대는 적진 한 가운데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가련한 군인같다는 생각이 밀려들어 우울해졌다.
형무소를 걷는 길은 한적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거기에는 다른 빛깔의 색이 있었다. 붉은벽돌때문이었을까. 푸른잔디가 품어내는 포근함, 사형장 앞에 커다랗게 서 있는. 사형수들이 형 집행전에 잡고서 흐느껴 울었다는 느티나무는 이제막 들어선 가을 빛깔에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아름다움이 서글퍼 졌다.
시대의 어둠앞에 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당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그 시절보다 나은 평등과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당신이 태워진 시간 위에 우리는 서 있다고 거대한 동굴안에서 말하듯 반복해서 들려왔다.
김윤선생님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부터 1년여간 구속되어 수감되셨던 서대문 형무소 찾아갔다. 서대문구 독립공원터에 자리 했던 서대문 형무소는 일부 축소되어 남아 있는 건물들이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한민국 국민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그 의지를 꺾지 위해서 지어졌다. 내부에는 서대문 형무소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부터 독립운동사, 독립운동가의 역사, 고문의 형태, 수감의 형태등이 여러방법으로 열거되고 재현되어 있다.
형무소내 전시장을 도는 내도록, 역사를 설명하는 영상물을 보는 내도록, 지금은 한적한 공원처럼된 푸른 잔디가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것을 보며 걷는 내도록 가슴이 먹먹하고 아렸다. 분명 이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했는데 해방이후에는 마치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억울하게 탄압을 받았던 것처럼 독재정권에 반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짓던 사람들이 역사를 반복하듯 그 곳에 수감되었다. 김윤선생님 역시 그 반복된 역사의 희생자였다. 그 사건들은 모두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졌고 그 조작된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받은 많은 이들이 있다. 일제 강점게에 그 권력을 쥔 자들이 우리국민들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여전히 반복적으로 답습되어지고 있었다. 외부세력이 우리 민족을 억압하던 그 구조물에서, 한 권력이 집권을 유지하고자 국민의 평등과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물로 다시 사용 되어진 것이었다. 또 한가지 놀랐던 사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그러한 해방이후의 역사적 오류는 연구되어 제대로 언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역사박물관으로 개관하게 될 당시 해방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규정을 만들어 문을 열었고 현재까지도 그 규정이 바뀌지 않고 있으며 개정을 위해 서대문 구청에 개정을 요구하더라도 의원들이 반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2016에도 그 역사는 정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구나 절감하였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사를 넘어 우리역사의 오류를 시인하고 우리의 민주화운동사를 제대로 말하고 연구하고 알려주었을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면서도 지금 이시대는 적진 한 가운데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가련한 군인같다는 생각이 밀려들어 우울해졌다.
형무소를 걷는 길은 한적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거기에는 다른 빛깔의 색이 있었다. 붉은벽돌때문이었을까. 푸른잔디가 품어내는 포근함, 사형장 앞에 커다랗게 서 있는 사형수들이 형 집행전에 잡고서 흐느껴 울었다는 느티나무는 이제막 들어선 가을 빛깔에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깊어가는 아름다움 만큼이나 슬픔이 밀려왔다.
시대의 어둠앞에 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당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그 시절보다 나은 평등과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당신이 태워진 시간 위에 우리는 서 있다고 거대한 동굴 안에서 말하듯 반복해서 들려왔다.
9월 25일
작년11월 14일, 민증 총 궐기 때 경찰의 거센 살수차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시던 백남기 농민이 결국 돌아가셨다.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체류탄을 맞고 죽음을 맞이 한 사건은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살수차에 쓰러져 목숨을 잃은 사건은 무엇이 다를까. 어쩌면 우리의 정치와 권력의 구도는 한발자욱도 더 나이 가지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인도 모르겠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울분과 함께 가슴이 돌에 짓눌러 진것 같은 답답함이 덥쳐왔다. 내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 앞으로 가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산에서 뛰어내려 몸을 던지셨던 날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만들었던 곡을 백남기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 울렸다. 그 곡으로 울면서 과연 내가 살아가며 몇번이나 이 곡을 비통한 마음으로 울리게 될 것인가 싶어져서 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옳은 것은 언제나 선한 마음이므로 약하였다. 권력과 욕망은 늘 언제나 약자 앞에서 강했고 그 피해는 늘 선한마음으로 부르짖는 이들의 몫이었다.
수많은 숭고한 목숨이 맞 바꾼 것은 평등 하고자 외쳤던 것. 가장 최소한의 지켜져야 하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 받길 원했던 것.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부르짖을 것이고 부르짖는 자는 적이 되어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 갈것이다.
똑똑히 지켜보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10월 2일
비가 주룩죽룩 오고 머리는 열기로 들끓는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것을 몸이 가장 먼저 알고서 반응한다.
빗물에, 뜰에 심어진 푸른 대나무가 젖어 일렁인다. 대나무는 곧고 푸른 모양대로의 침묵으로 말하고 촉촉히 젖은 항아리는 항아리대로의 가진 색과 모양의 침묵으로 거기에서 가만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은 그 삶에서 보여준 태도로써 사후 침묵의 모습을 결정하는 듯 하다.
살아오며 보여준 자세와 태도와 마음이 사후에 그대로 화석이 되어 침묵으로 연속되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여기, 양초가 타고 있다.
이 양초의 형상은 김윤님이 민청학련사건의 유일한 여성으로 서대문 형문소(서울구치소)에 수감 되었다가 다음해에 형집행정지를 받고서 출소하여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어머니 김한림선생님과 얼싸안는 장면이다.
출소하는 문. 그 문으로 나서며 줄곧 같은 태도의 삶을 살아간다. 심장질환을 앓는 몸, 그 몸의 제약에도 아랑곳 않고 또 농민의 인권과 교육과 여건신장을 위한 일들을 펼쳐나간다.
그래서 그 형무소 앞, 출소하는 문 앞에서 찍힌 사진한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삶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문 앞이며 치열하게 살아갈 삶의 시작점이며 또 연장선이 되는 문. 그래서 그대로 화석이 되어도 좋을 한 사람의 침묵이다.
그 침묵은 소리없이 타고 있다.
그렇게 태워진 자신의 침묵은 빛과 맞바꾸어진다.
내가 만난 김윤선생님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태워 횃불이 되어 불꽃같은 삶은 살아내신 분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지금, 이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고 또 내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