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암 운몽도 雲夢圖

110 cmx70cm, 한지위에 사진 꼴라쥬, 2016

자우홍련사 누각에 앉아 차 한잔 마시고 앉아 있으면 평온한 마음으로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마음이 들어온다. 작품은 동다송(東茶頌)의 마지막 연의 싯구절을 인용해 일지암에 핀 여름한철 수국의 푸름과 일지암 주변의 풀잎, 나무, 돌과 대흥사를 지나 세상으로 걸어가며 찍은 사진을 이용하여  엮은 운몽도 이다. 꿈속의 구름을 그린 이 그림은 실은 꿈이 아니라일지암에서는 실로 느끼게 되는 세상과 맞바꾼 몽환인 것을 모두가 알게되길 바란다.




 

 

옥화차 한잔을 마시면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어나니

몸이 가벼워져 이미 하늘의 경계를 거니는 듯 하다.

밝은 달은 촛불이 되고 친구도 되며

흰구름은 자리가 되고 그대로 병풍도 되어준다.

대숲소리와 솔바람 소리 모두 쓸쓸하고 서늘하나

맑고 찬기운이 뼈속까지 일어 마음을 일깨운다.

오직 흰구름과 밝은 달을 벗 삼으니 도인의 자리는

여기기 가장 좋지 않은가

동사송 중, 초의

 

두륜산의 중턱에 자리한 일지암은 초의 선사가 39세 되던 해인 1824년에 지어져 사십년 가까이 지내며 차를 재배하고 좋은 차를 만들어 나누며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고, 차 만드는 법을 시로엮은 동다송과 다신전을 펴낸 우리나라 차의 성지 같은 곳이다.  두번에 걸친 체류를 통해 이해하게 된 이 일지암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지만 그 의미를 넘어 누구나 찾아와 아름다운 곳을 누리고 차 나누며 그 일지암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까지도 이곳을 찾는 발걸음들은 소중한 것을 돌보는 마음으로 일지암에 들려 그 겸허하고 단촐한 초가에 귀감을 얻고 자우홍련사 누각에 올라 누가 있던 없던 홀로 조용히 차를 마시고 떠난다. 오늘날 세상의 번잡함을 떠나 그런 자연앞에 숙연하여 지는 겸손한 마음으로 한 때를 보낼 수 있는 것, 그러한 마음을 가져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초의선사의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또 이 공간이 허락한 특권이지 않은가 한다. 

 

자우홍련사 누각에 앉아 차 한잔 마시고 앉아 있으면 평온한 마음으로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마음이 들어온다.

작품은 동다송(東茶頌)의 마지막 연의 싯구절을 인용해 일지암에 핀 여름한철 수국의 푸름과 일지암 주변의 풀잎, 나무, 돌과 대흥사를 지나 세상으로 걸어가며 찍은 사진을 이용하여  엮은 운몽도 이다. 꿈속의 구름을 그린 이 그림은 실은 꿈이 아니라일지암에서는 실로 느끼게 되는 세상과 맞바꾼 몽환인 것을 모두가 알게되길 바란다.

 

 

<일지 편지 2 >

 

일지암에서 사흘.

 

지금 제가 앉아있는 자우홍련사 누각에는 처마의 끝을 따라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앞에 펼쳐진 두륜산의 능선은 흐르는 구름에 흐려졌다가 짙어지기를 반복하며 절로 그림을 그립니다. 누각아래에 있는 연못에는 하얀연꽃과 노란창포와 푸른 수국이 피어있습니다. 이승의 꽃이 아니라 하는, 이 비현실적이게 푸르른 수국 뒤에 자리한 일지암은 단아하면서도 그 겸손한 자태가 실로 이승의 풍경이 아닌 듯 하다가도 그 자연과의 조화로움이 이곳에 있어야만 하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반드시 일지암이어야하는 , 필연적으로 느껴집니다.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과, 소치 허련도 함께 차의 맛을 음미하며 나누고 깊어졌을  학문적인 것, 정치적인 것, 예술적인 것의 의미를 상상하여봅니다. 밭 일구며 사는 , 일구어지는 것이 무엇인 줄을 알고 단촐한 암자에서 나누었던 수양의 시간들이 지금에서도 평가받고 지켜야하는 가치로 여기는 것은 거기에 우리가 지켜야 선대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주지스님이 자리를 비운 이 일지암에 사흘을 홀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일지암 초당에서 불피워 잠을 잤습니다. 구들에 마른가지 쌓아올려 불을 태우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인 몰랐습니다. 전기로 이룬 불빛이란 없어 초 하나에 의지하며 후후 불어대던 얼굴은 사극같은데서 시커멓게 그을려진 채로  잠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불을 피우는데 성공하지 않았는데도 잠시 일어났던 불길이 방을 덥혔는데 기운이 아침까지 남아 온기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난방 방식이란 이토록 대단한 것인 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방 안은 장작내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이미 딴세상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전엔 익숙하였을 집의 냄새일 것입니다. 안이 밖이고도 밖이 안이 되는 집안에는 춥고 눅눅한 날들이면 마른가지와 맞바꾼 온도와 향이 방안에 가득한, 그것이 삶이고 매일이었을 삶.  콘크리트로 지어진 집에 살던 우리에게 이제 이러한 경험이란 기억 이전의 것이 되어버렸지요. 이런 것이 우리의 향수라고, 이 구수한 향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불러다 방에 앉혀둡니다.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밤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 단촐한 방에 홀로 구들불 피워 누워봅니다낮은 낮대로의 운치와 밤은 밤대로 깊은 산사의 정취가 있습니다. 쏟아지는 별밤이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대신 처마의 끝마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흙내음과 함께 가슴을 달굽니다.

문득, 일지암 초당에 누워 초의선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차나무 가꾸고, 차잎을 따고, 덖어 차를 만들고서, 좋은 물에 내려 마시는 일련의 과정은 인간이 자연을 누리는 과정 가운데 가장 온화하고 기품이 넘치는,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자연을 닮아감으로 하나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마음이 만들었을 일지암이기 때문에 깊은 산중 홀로 누워있으면서도 두려움을 잊게 하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를 잊지 않고 계승한다는 것, 그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것만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시작을 이해하고 마음이 전하는 가치를 후대에 전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일지암에서 마음을 담아내는 작품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촐하고 소박한 건물이 주는 의미들을 걷고 맴돌고 읽어내어 하나의 일지(一枝), 나무가지 하나로도 충만한 삶의 집을 지어내야 것입니다.

 

깊은 산속의 암자는 물을 먹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구름 속에는 온갖 산짐승과, 곤충과, 나무와 풀과, 차나무와, 그리고 나무, 흙과 짚으로 지어진 집하나와 저도 있습니다.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꼭꼭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하여 편안한 밤입니다.

 

이천십육년 유월 십이일

이서

 

<일지편지2>

 

다시 일지암으로.

 

새벽 잠을 설치고서 일어나선 무작정 기차를 탔습니다. 그렇게 다시,  다시 일지암으로.

 

비가 줄곧 오던 지난 번과 달리, 일지암에는 청명한 햇살이 머물고 바람이 스몄습니다.  일지암을 둘러싼 풍경이  큰 그림 하나로 보여졌던 지난번 방문과는 다르게 햇살이 부서지 듯 흩어져 숲을 비추니 절로 풀 하나, 돌 하나, 꽃 하나,  소소한 모든 것에 돋보기로 들여다 보 듯 천천히 내 눈길이 머뭅니다.

 

자신도 대지에서 피어난 한 생명이라고 삐쭉 돌 틈에서 솟아 햇살을 향해 있는 대웅전 앞 마당의 이름 모를 풀잎들,  저녁 햇살에 젖어 바람에 우수수 누웠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풀섶, 터질 듯 터트리기를 아끼는 무궁화의 봉오리들과 빛과 바람에 이리저리 서로를 비벼대며 스스스 부서지는, 암자를 병풍처럼 둘러싼 초록 잎들의 떨림.  이 모든 소소한 움직임이 아우성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자우홍련사를 딛고 오르는 계단에 걸쳐 앉아 부는 바람 가운데에 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는 바람을 아는가 묻게 됩니다. 보는 것으로, 듣는 것으로, 촉감으로, 나를 에워싼 공기의 흐름이 자연 속에서 노니는 장면을 모든 감각으로 느끼며 바람이 거기 있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이 바람은 나를 그 자리에 가만히 세워두고서 여기로 저기로 데리고 다니며 기묘한 술책을 부립니다.  소중히 간직하고픈 아주 매혹적인 경험입니다. 

 

색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일지암 앞 연못에 핀 파란 수국. 마치 이 파란 수국의 꽃잎은 햇살에 부서졌다가 다시 엉겨붙은 것 처럼 모락모락 피어나 있는 파랑으로 맺혀있습니다. 이 공간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다 놓은 듯  몽환적이기도 한 푸른빛. 오직 이 곳에서만 그려질 이 빛깔을 나는 일지암파랑이라 이름하려고 합니다. 이브클랑의 그것과 비견되는 생명력에서 오는 숭고함.  지속 불가능한 숙명이 가진 모든 것을 토해내는 순수. 영원한 것이란 없으면서 이 찰나의 감성이 기억으로 지속되어지는 영원성. 영원이란 그런 것이라고, 초감각으로 일러주는 찬란한 일지암파랑.

 

일지암의 지붕을 버티고 있는 기둥에는 동다송의 첫 구절이 목각 되어 둘러져 있습니다. 차를 시로 읊던 마음이 병풍치 듯 둘러져 있습니다.  시란 자못 깨달음의 경지에 있을 때라야 써지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차가 어디서 오는 것인 줄을, 차를 기르고, 그 때에 맞게 거두고, 최고의 맛을 내는 불의 세기와 물맛의 깊이를 아는 숱한 수행을 통해 얻었을 깨달음. 그 깨달음이 차 맛으로 이어지는 그 음미를 최고로 누리는 일이 초의에게는 곧 시가 아니었을까요.  차만드는 법이 싯구절로 이루어진 동다송은 어쩌면 일상을 가장 숭고한 삶의 경지로 이끌어낸 결정체, 그것이지 않은가하고 자우홍련사의 누각에서 차향 맡으며 동다송을 읽고 있으니 절로 그런 생각이 피어오릅니다.

 

그래서, 일지암. 이 소박하고 단촐하고 작은 암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자의 깨달임이었을 것입니다. 비워졌을 때야 비로소 작은 것의 귀함을, 허공의 청명함을, 고요 가운데 흐르는 공기의 맑은 울림을 보고 듣고 만져 보라고 소리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초의 선사의 이 단촐한 거처는 비워내는 삶과 맞바꾼 것이 무엇인지 보라- 하고 지그시 내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태양을 받고 이슬을 머금은 차나무가 있고, 그 차의 영험함 알고 거두고  나누면서 그 기쁨이  시가 되어지는 삶. 그것이 차와 선과 시가 하나라 했던 그 마음일 것이다 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서 헤아려 봅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또 하나의 일지암, 오늘의 마음으로 헤아린 나뭇가지 하나의 암자를  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또 다른 가지를 늘어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워진 자리에 머문 눈길이 얻어가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주어야 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한줌, 흩날리는 잎새 사이의 바람을,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감을 주는 절묘한 자연 색의 묘미를, 구석구석 풀잎 하나 나무의 잎사귀 하나도 비추어 주는 긴 꼬리를 문 저녁 햇살을,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은 얼마나 찬란히 빛나고 아름답고 조화로운 존재인지를 보여주어야 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산하기 전에 대웅전 맞은 편 아래에 세워진 도서관에 앉아 두륜산 자락을 내려다 봅니다. 치마자락처럼 겹쳐 흐르는 산의 능선이 유유히 또 웅장하게 흐릅니다. 마음에 어떤 음악적 시상이 떠오르는 그림입니다. 우리의 풍경에 꼭 어울리는 마음가짐과 멋이 여기 일지암에 있었던 것이리라 싶습니다.

다시, 산을 내려갑니다.

 

이천십육년 유월 이십육일 

이서

 

 

 

 

 

 

 

 

 

 

 

재입고 알림 신청
휴대폰 번호
-
-
재입고 시 알림
페이스북
네이버 블로그
floating-button-img